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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라가 최고존엄 존예보스라는 사실 하나는 확실한 하이틴 드라마 스캄

노르웨이 스캄 시즌 1 줄거리 및 평가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캄은 노르웨이에서 국민 드라마라 불리며 노르웨이 역사상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고, 여러 나라에서 리메이크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하이틴 드라마이다. 드라마를 자주 보는 편은 아니지만 넷상에서 호평밖에 보지 못한 드라마라 흥미가 생겼다. 미드를 보다 보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시즌에 지쳐서 중간에 하차해버리는 참을성 없는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애니 1쿨 정도의 분량을 가진 스캄은 부담 없이 도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 보고 나니 짧은 작품의 길이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작품이 길었다면 황금 같은 주말 시간을 낭비했다며 억울한 마음이 들었을 테니. 넷상에서 극찬 가득한 영업 글을 참 많이 봤는데, 결국 하이틴 장르라는 틀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 작품이기에 너무 과한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적어도 내가 본 시즌1의 인상은 그랬다. 

 

 일단 여기선 전형적인 막장 하이틴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을 다 볼 수 있다. 고등학생들이 즐기는 술, 마약, 파티, 그리고 섹스. 얽히고 설키는 다각관계. 소위 잘 나가는 애들이라면 당연 들어야 할 사교 클럽의 존재. 학교에서 외톨이로 지내던 주인공이 얼떨결에 위험한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고, 순간 흔들린 감정으로 저지르게 된 실수로 무너지는 연애관계, 그리고 금이 가는 우정. 일이 꼬이고 꼬여 학교에선 왕따가 되고 락커에서 발견되는 살벌한 협박편지. 결국 오해와 갈등을 풀고 성장하는 주인공. 하이틴 장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개라서,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 가능한 부분도 많았다. 파티 중에 혼자 방에서 울고 있는 에바 앞에 우연처럼 크리스가 등장하고, 둘이 키스를 시작할 땐 '도대체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드라마를 보면서 머릿속을 계속 맴돌던 말이 3학년 루스 버스의 리더인 마리아의 입을 통해 나왔을 땐 짜릿한 쾌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학생 땐 엄청 심각해 보이는 일이 시간이 지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지금 네가 누구랑 지지고 볶던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고. 하이틴물은 이래서 나이를 먹고 나면 즐길 수가 없다. 중학교 때는 미국 하이틴 소설을 꽤 열심히 읽었는데, 그때 나이의 두배가 되어버린 지금은 영 매력을 느끼기 힘든 장르이다.   

 

 새롭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엔딩이라 본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음 시즌을 봐야 할지는 좀 고민이 된다. 엔딩에서 시즌2의 누라와 시즌3의 이삭에 대한 떡밥을 대놓고 뿌리는데, 누라라는 캐릭터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윌리엄이라는 캐릭터와 엮이는 게 맘에 들지 않는다. 돈 많고 싹수없는 남자가 당돌한 여자에게 반해서 들이대는 관계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시절부터 우려진 사골이라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로감이 생긴다 (솔직히 그냥 윌리엄이 보기 싫어서 시즌2가 꺼려진다.) 그런데 누라는 이 와중에 이쁘고, 믿음직하고, 매력 있고, 혼자 다하고 있어서 호기심은 생긴다. 또한 시즌3이 스캄을 세계적으로 알린 시즌이라고 하니 좀 더 참을성을 가지고 봐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클리셰적인 하이틴물에 BL만 끼얹은 작품이 아니길 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드라마이니 분명 더 뭔가 있으리라 믿는다. 시즌1은 그냥 떡밥만 깔아주는 추진력을 위한 시즌인 거죠, 그렇죠? 

 

 시즌이 진행될수록 좀 더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룬다는 리뷰들이 많아서 시즌1만 보고 하차하기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기대감은 내려갔지만 그래도 호기심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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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플레이하면서 게롤트보다도 더 정이가던 메브 여왕님

 

 

 위쳐 시리즈로 유명한 CDPR에서 만든 위쳐의 스핀오프 격인 카드 게임. 위쳐에 등장하던 카드게임인 궨트에 스토리를 넣어 독립적인 작품으로 만든 것인데, 발매 전 정보를 읽을 때부터 너무나 취향 저격이라 발매하자마자 부랴부랴 사서 플레이했던 게임이다. 맵도 생각보다 많고 분량도 길어서,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를 전부 하고, 맵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더니 플레이타임이 50시간 가까이 되었다(아무래도 카드 게임이 서툴러서 오래 걸린듯한 느낌.) 개인적으로 2018년도에 플레이했던 게임 중에 제일 신나게 했던 게임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재미를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쩝.

 

 

1. 위쳐 세계관답게 쉴 새 없이 뒤통수를 가격하는 스토리

 

 몰입도 높은 탄탄한 스토리와 입체적이며 개성 있는 캐릭터들, 그리고 플레이어들의 가치관을 시험하며 괴로운 선택을 하게 만드는 퀘스트들. 위쳐의 스토리텔링에서 느꼈던 그 장점들은 쓰론브레이커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 특유의 선과 악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전개는 끊임없이 플레이어들을 갈등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져야 한다는 점이 바로 이 위쳐 세계관의 최고의 매력이다. 음성까지 지원하는 완벽한 한국어화에, 캐주얼하면서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선 굵은 2D 그래픽은 매력적인 스토리에 더욱더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위쳐의 스토리와 다른 점을 꼽아본다면 주인공이 게롤트가 아닌 메브라는 점. 주로 단독적으로 활동하는 위쳐인 게롤트와는 달리 메브는 군사들을 이끄는 지휘관이자 나라를 되찾아야 하는 군주이기에, 그녀가 마주하는 선택지는 좀 더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롤트의 선택지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자비로운 군주로서 적을 용서하고 아군으로 만들어야 할지, 아니면 끝까지 처벌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야 할지. 굶주림이 허덕이는 백성들을 도와야 할지, 아니면 당장 전투를 앞둔 군사들을 우선시하여 백성들의 고통은 무시해야 할지. 지금 내 앞에 있는 자의 충성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의심해야 할지. 조국이라는 대의를 위하여 신하들을 희생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어떤 선택이 옳고 틀린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점은 인생은 새옹지마이며, 위쳐 세계관에서 뒤통수를 맞는 일은 일상적이라는 것이다.  게롤트는 알려지지 않은 영웅(unsung hero)의 모습이지만 메브는 정반대로 대륙의 역사책을 새로 쓰는 군주의 모습이기에, 스토리에서 다른 결의 매력이 느껴진다.  

 

 

2. 퍼즐 마니아라면 무조건 빠져들 궨트 게임

 

 쓰론 브레이커에 등장하는 궨트는 위쳐 인게임에서 등장하던 궨트와는 룰이 꽤 많이 다르다. 일단 줄이 3줄에서 2줄로 줄었고, 각 카드에 존재하던 위치 제한이 없어져서 전방이던 후방이던 원하는 곳에 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각 카드가 가진 능력이 굉장히 다양해져서 초반에는 카드 하나하나의 능력을 이해하느라 좀 시간이 걸렸다. 경험해본 카드게임이라곤 위쳐의 궨트밖엔 없는지라 이해하는데 더 오래 걸렸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덱에 익숙해지고, 카드의 능력들을 조합하는 묘미를 알고 나면 전투가 매우 재밌어진다. 

 

 그리고 위쳐의 궨트와 다른 또 하나의 차이점은 바로 약식 전투의 존재이다. 물론 상대 캐릭터의 덱을 찍어 누르는 전통적인 카드 게임도 등장하지만, 일단 서브 퀘스트들은 거의 다 약식 전투인데, 퍼즐을 푸는 것과 비슷하다. 전투마다 정해준 룰을 따라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 턴 수가 제한되기도 하고, 주어진 카드만 써서 플레이해야 하기도 한다. 퍼즐을 풀 수 있는 수는 정해져 있어서, 한 번의 실수가 패배로 직결되는 경우가 많다. 임기응변과 운으로 어찌어찌 해결할 수도 있는 카드게임이 아니라 정해진 답을 찾아야만 풀 수 있는 퍼즐과 같다. 약식 전투마다 다른 룰과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하나 해결해가며 스토리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낮은 난이도에선 전투와 퍼즐을 스킵하고 스토리만 보며 진행할 수 있는 옵션도 존재하니 심하게 스트레스받을 필요는 없다. 궨트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놓치기엔 너무나 아까운 게임이다. 

 

 

요약하자면, 이 게임은 이런 게이머들에게 추천한다:

 

-판타지를 좋아한다

-스토리가 탄탄한 게임이 좋다

-다양한 선택지와 결과가 존재하는 게임이 좋다

-위쳐를 재밌게 했다

-카리스마 있는 여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게임이 좋다

-퍼즐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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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 앉은 대원(김윤석)의 시선이 신경쓰이는 두 가족의 포스터

 

영화 미성년 줄거리 및 해석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쉽게 나오는 영화의 줄거리만 봤을 때는 좀처럼 끌리지 않는 불륜 소재의 막장 드라마 같았지만, 스카이캐슬로 인해 팬이 되어버린 염정아 배우님의 작품이라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영화이다. 하지만 이젠 당당하게 추천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빠심'으로 참고 보는 영화가 아니라,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 곱씹게 만드는, 묘한 끌림을 가진 작품이라고. 

 

 줄거리를 설명하자면, 대원(김윤석)과 미희(김소진)가 바람을 피우는 장면을 대원의 딸인 주리(김혜준)가 목격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리고 미희의 딸인 윤아(박세진)는 주리와 같은 반 학생인 황당한 상황. 주리는 엄마 몰래 대원과 미희를 갈라놓기 위해 윤아에게 찾아가 따지지만, 윤아는 오히려 방관하는 태도로 나온다. 알고 보니 미희는 이미 임신 상태였고, 심지어 아이를 낳을 계획이었던 것. 주리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비밀로 하고 싶었지만, 결국 주리의 엄마, 영주(염정아)도 불륜 사실에 대해 알게 된다. 미희를 찾아간 영주는 미희의 뻔뻔한 태도에 화가 나 작은 몸싸움을 하게 되고, 그것 때문이었는지 미희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며 조산을 한다. 미희의 아이 '못난이'는 그 어떤 어른도 관심을 주지 않지만, 오직 윤아와 주리만이 그 아이에게 애정을 보인다. 하지만 못난이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윤아와 주리는 못난이의 죽음을 그들만의 방법으로 기억하기 위해 충격적인(...) 방법을 선택한다. 바로 못난이를 화장하고 남은 뼛가루를 우유에 타서 마시는 것. 황당함을 넘어서서 역겨움까지 느껴질 수 있는 엔딩. 김윤석 감독이 수십 번의 수정과정을 거쳐서 만든 엔딩이라고 한다. 못난이의 죽음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무책임한 태도와 죄까지도 기억하자는 젊은이들의 반항정신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을 듯.

 

 여튼 상당히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포커스는 등장인물들과 그 인물들이 만들어가는 독특한 관계성에 있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어른이 아닌 아이들의 시점에서 다루기 때문에 상당히 담백하고 신선하게 다가오고, 결국 이 영화는 어른들의 치정극이 아닌 아이들의 성장물이라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미성숙한 어른들의 성장통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미성년'이라는 제목은 일으킨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미성숙한 어른들과, 그 어른들 대신 책임을 지며 성숙해져 가는 아름다운(美) 아이들을 이중적으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은 여전히 아이들이고, 어른은 결국 어른이구나, '라는 게 느껴지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윤아가 미희의 아이를 스스로 키우겠다며 너무나 쉽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할 때. 또는 주리가 영주에게 전화에서 학원 땡땡이치고 같이 밥 먹고 싶다고 할 때. 순수한 두 아이들은 아직 어른들의 따뜻한 품과 현실적인 충고가 필요하지만, 이 영화엔 그런 완벽한 멘토 같은 어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의 문제 많은 부모들은 '어른'이다. 순진하지만 거짓 없는 시선으로 세상을 직시하며, 온몸으로 부딪쳐서 강화 유리도 박살 내버리는 그런 패기를 가진 미성년이 아니라, 거짓된 마스크 뒤로 본심을 숨긴 체, 편리하게 현실을 외면해버리고 마는 어른들이다. 그리고 그런 거짓된 모습은 미희와 영주라는 강렬하게 대비되는 두 엄마들을 통해 표현된다.

 

 

위선의 영주, 위악의 미희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제일 흥미롭게 느껴졌던 두 인물들이 바로 영주와 미희이었다. 영화 내내 좀처럼 진심을 알기 힘든 캐릭터들인데, 그들의 거짓된 행동과 진실된 행동이 교차하는 순간순간이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느껴졌다. 

 

 

강인한듯 위태로워 보이는 영주(염정아)

 

 영주는 무서울 정도로 스스로의 감정을 눌러 참는 사람이다. 남편의 불륜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침착하게 행동하려 노력한다.  화를 내는 대신 남편의 아침을 준비하고, 딸의 주먹밥을 챙겨준다. 미희에게 찾아갔을 때도 머리끄덩이를 잡는 대신 밥값만 내고 식당을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심지어 윤아를 처음 만났을 때도 밥은 챙겨 먹고 다니라며 친엄마도 하지 않는 걱정을 한다. 그리고 그 후엔 부탁하지도 않은 병원비도 내주고, 미희에겐 전복죽도 싸가고, 마지막엔 찌질함의 끝을 보여주는 남편까지도 챙기는... 아무튼 불륜 물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본처 vs 불륜녀의 캣파이트나 남편을 엿 먹이는 통쾌한 복수는 등장하지 않고, 아가페 사랑을 실천하는 성령 충만한 자매님의 모습만이 보인다. 학교에선 쌈박질에, 병원에선 추격전에, 하루 종일 뛰어다니다 결국 지쳐서 누워버린 주리에게 '머리 자르고 오는 길에 떡볶이 사 올까?'라며 짐짓 가벼운 목소리를 묻는 영주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분명 방금 전에 처음 만난 불륜녀를 밀쳐버렸는데 조산을 해서 병원까지 갔다 오고, 남편은 나 몰라라 도망가버렸고, 아빠에게 실망해서 엉엉 우는 딸을 데리고 밤늦게 집에 왔는데, 이제 머리를 자르고 떡볶이를 사러 간다고요? 이 억지스러움은 영주가 얼마나 강제적으로 스스로의 감정을 억누르며, 작위적인 평온함을 연출하는지 보여준다. 

 

 그렇게 힘겹게 연기하는 모습은 아마 영주가 상상하는 어른의 모습일 것이다. 아이 앞에서 만큼은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 가족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 내가 아닌 남들을 더 위하는 것. 주변의 현실이 무너져 내릴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더욱더 악착같이 그 위선적인 겉모습에 매달린다. 하지만 그 신념에 매달릴수록 영주의 모습은 더욱 위태롭게 보이기만 한다. 눌러 담은 감정들이 밖으로 삐져나오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럴 때 영주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들은 너무나 날것 그 자체여서, 소름 끼치게 강렬하다. 식당에서 올 나간 스타킹을 바라볼 때나, 차 안에 흘린 미희의 피를 닦아낼 때. 작위적인 연기를 통해서 그런 감정들은 눌러 삼킬 때, 그녀는 진심으로 어른다운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영주는 대원에게 네 사람을 기만했다며 비난하지만,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는 인물이다.

 

 힘겹게 감정을 억눌러온 영주가 결국 참지 못하고 완전히 무너져버리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고해성사 씬과 윤아와의 식탁 씬이다. 미희가 조산을 한 것이 본인 탓일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고해성사를 통해 괴로움을 토로하는데, 그 후에 이어지는 영주의 본심은 앞으로의 그녀의 행동이 결국 위선임을 증명한다. '내 잘못이 아니고, 내가 미워하는 저 사람들이 정말 나쁜 사람들이어서, 저 애기가 저렇게 아픈 게 하느님이 내린 벌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본인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편리하게 생각하고 싶어 한다. 나중에 그녀가 내고 간 병원비를 갚기 위해 찾아온 윤아 앞에서 결국 울어버린 건 아마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껴서 그런 것이 아녔을까. 엄마가 저지른 일에 아이가 책임을 지겠다며 아르바이트 한 돈을 아낌없이 꺼내고, 심지어 모자란 돈은 나중에 갚겠다고 한다. 짐짓 어른스러운 모습으로 영주가 윤아에게 '중요한 시기인 만큼 흔들리지 말라'라고 충고하지만, 윤아는 '주리 걱정이나 하세요'라고 받아친다. 어른들 모두가 외면해버리는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찾아온 윤아 앞에서 영주는 그런 충고를 할 자격이 있는 어른일까?  

 

 

입맛까지도 초딩인 과자 덕후 미희(김소진)

 

 미희는 영주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가진 인물이다. 딸을 위해 모든 걸 신경 쓰고 챙기는 영주와는 다르게 오히려 미희는 딸인 윤아에게 역으로 챙김을 받는 부모이다. 임신까지 해버린 엄마에게 정신 차리라며 꾸짖는 윤아와 왜 자길 이해해주지 못하냐며 화를 내는 미희. 미희는 꼭 버릇없는 아이처럼 악을 쓰고, 분에 못 이겨 성질을 부린다. 그녀는 스스로가 어른이자 부모라는 자각이 없어 보이며, 심지어 성장이 멈춘듯한 느낌까지 든다. 병원에서 주리를 만났을 때 그녀가 제일 먼저 찾는 것은 바로 꼬북칩. 새로 나온 맛이냐며 물을 때 미희의 표정과 말투는 너무나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그 자체로 보여서 놀라울 정도였다. 불륜 상대의 딸을 만나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꼬북칩이라니.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악의 없는 악이라는 게 맞는 말인가 보다. 일관되게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며, 주변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는 미희는 이 영화에서 제일 미성숙하며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캐릭터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런 모습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 바로 압도적인 몰입도를 자랑하는 대원과의 마지막 통화 씬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이 미희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화 넘어의 대원의 목소리에 안도하다가, 설마 하며 의심하다가, 인정할 수 없어 애원하다가, 결국 '마지막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의 배신에 상처 받고,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던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순간까지의 감정 변화가 물 흐르듯 펼쳐진다. 대원을 믿었기에 주변 사람들은 물론이고 딸까지도 적으로 취급한 그녀였는데. 지금까진 그녀와 '마지막 사랑'만이 존재하는 꿈같은 세계에 살며 현실을 배척했지만, 결국 그 꿈은 끝나버렸다.   

 

 

미희의 아갈머리를 확 찢고싶은 충동을 참으며 대신 죽을 만들어온 영주

 

 영주와 미희가 만나는 병원씬은 두 인물에게 있어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다. 전까진 불륜이 문제라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던 미희는 이젠 스스로 한 행동에 대한 자각이 생긴 것처럼, 이전의 뻔뻔함은 수그러든 느낌이 든다. 꿈에서 깨어나버린 미희는 이젠 묘한 부끄러움과 수치심, 그리고 영주를 앞에 둔 이 상황에서 비참함을 느낀다. 건강을 염려하는척하며 죽을 챙겨 온 영주에게 제발 깔끔하게 한대 치고 떠나라고 애원한다. 하지만 영주는 그렇게 쉽게 미희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다. 애초에 그녀는 미희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었으니. 

 

 변화된 미희 앞에서 영주 또한 가면을 벗고 진심을 들어낸다. '바람 한번 피워보세요. 그게 생각대로 되나'라고 솔직하게 털어놓는 미희를 보는 영주의 얼굴에는 아주 찰나의 순간에 살벌한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모든 게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가감 없이 털어놓는 불륜녀의 모습을 아마 영주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희의 힘들어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동시에 선하고 자비로운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찾아왔으나, 오히려 생각보다 멀쩡한 그녀의 모습에 좌절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순간 영주는 모든 걸 내려놓고 진심을 털어놓는다. 가식적인 위로를 주고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다고. 그리고 그걸로 살아갈 힘을 얻고 싶었다고.

 

 다른 곳에선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공유하게 되어버린 두 사람. 서로가 미치도록 보기 싫은 상대일 텐데, 이상하게도 이 순간 서로의 본심을 들어내며 오히려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김윤석 감독은 인터뷰에서 미희의 아이, 못난이를 "예수"에 비유한다. 못난이의 죽음으로 어른들의 죄를 사하고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일까? 못난이의 죽음 후에 어른들은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영주는 불량 청소년들한테 얻어터진 찌질한 남편을 챙기며 결국 이전처럼 작위적인 가족의 평온함을 유지하고, 미희는 윤아가 꺼내 주는 김치와 라면을 먹으며 끝까지 챙김을 받는다. 하지만 못난이는 잊히지 않았으며, 어른들의 죄도 사해지지 않았다. 윤아와 주리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못난이를 기억하고, 어른들의 무책임했던 행동 또한 기억한다. 겉으로는 전과 다를 바 없지만 정말로 어른들은 변화하지 않았을까? 변했을지언정 그들은 '어른'이기에 겉으로 티를 내지 않으며 언제나처럼 위선 혹은 위악의 가면을 쓰는 그들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더욱 안쓰러워 보인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이들이라지만, 영주와 미희의 변화 가능성을 영화가 좀 더 명확하게 보여줬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장물이 될 수 있었을 거 같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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