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명탐정 피카츄 - 줄거리 및 평가
이 리뷰에는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때 포켓몬에 미쳐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포켓몬을 빼놓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 당시에 포켓몬의 등장은 충격 그 자체였고, 아마 그 시절 학교를 다녔던 이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것이다. 저녁에는 SBS에서 방송하는 TVA를 빠짐없이 챙겨보고, PC통신에서 레드/블루/옐로 버전별로 다운로드하여 플레이하며, 포켓몬 빵에서 나오는 스티커를 책받침에 정성스럽게 모으고, 극장에서 첫 번째 극장판 뮤츠의 역습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동에 울먹거리기도 하였으니. 지금은 포켓몬에 관심이 많이 시들었지만 그럼에도 어렸을 때 매일 상상하던 그 포켓몬 세계가 실사화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짜릿한 일이다. 그렇기에 영화 명탐정 피카츄는 제작 발표 때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와 걱정을 동시에 받았다. 일본 만화가 실사화되어서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은 아예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 다행히도 포켓몬들의 디자인과 움직임은 현실적이면서도 기존의 개성과 귀여움을 잘 유지한다. 포켓몬들의 특징을 살리면서도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지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이상은 기대하면 안 되는 영화이다.
이것은 결국 포켓몬이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
주인공인 피카츄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후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 하는 탐정이다. 뛰어난 추리력과 비밀스러운 과거, 그리고 시종일관 잃지 않는 유머감각까지. 이러한 다양한 능력과 개성을 가진 피카츄가 만들 수 있는 서사가 무궁무진할꺼라거 생각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럽다. 피카츄는 명탐정이지만 추리를 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백만 볼트나 전광석화 같은 기술도 사용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피카츄는 멋진 활약상 대신 걸걸한 입담을 뽐내는 말동무의 포지션에 한정되어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은 '명탐정 피카츄'라는 제목과는 달리 피카츄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피카츄의 트레이너인 팀 굿맨이고, 이 영화는 그의 성장물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전투씬. 겉으로는 피카츄 vs. 뮤츠라는 어마어마한 상징성을 가진 두 포켓몬들의 격돌이지만 사실 피카츄는 포켓몬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인 해리 굿맨이고, 빌런인 뮤츠는 라임 시티의 전시장인 하워드 클리포드이다. 이 이야기는 포켓몬이 아닌, 포켓몬의 겉모습을 빌린 두 사람의 이야기인 것이다.
해리 굿맨의 영혼은 기억을 잃은 상태로 피카츄의 몸에 들어가 있었지만, 마지막엔 뮤츠의 도움으로 인간의 몸을 되찾게 된다. 여러 사건을 겪으며 쌓아 올린 팀과 피카츄 사이의 유대감은 이 반전으로 인해 트레이너와 포켓몬의 관계가 아닌 부자관계로 변질된다. 그리고 피카츄는 영화 내내 보여주던 특유의 말투와 매력을 잃어버리고, 대신 우리에게 친숙한 귀여운 전기 뚱땡이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라이언 레이놀즈가 직접 등장하는 순간 주인공이 갑자기 바뀌어버린 거 같아서 묘한 배신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명탐정 피카츄가 아니라 명탐정 해리 굿맨의 이야기였던 것이다.
피카츄에 대적하는 뮤츠도 정체성이 불분명한 악역 캐릭터이다. 뮤츠는 극장판 1기 뮤츠의 역습을 오마주 하며 임팩트 있게 등장한다. 인간들에게 강한 적개심을 들어내며, 자신을 감히 이용하려 한 인간들을 오히려 역으로 지배하려는 무시무시한 포켓몬의 모습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뮤츠는 해리를 공격한 게 아니라 구해준 선한 캐릭터였고, 이 작품의 진정한 빌런 하워드 클리포드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며 세상을 구한다. 행동 동기와 이유에 대한 설명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뮤츠는 영화 내내 뒤죽박죽 일관성이 없어 보인다. 인간은 악하지만 해리 굿맨은 괜찮은 사람이었으니 다른 인간들도 다 살려주겠다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하다 보니, 뮤츠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캐릭터가 입체적이라 헷갈리는 게 아니라, 너무 설명이 부족하고 동기가 설득력이 없어서 헷갈리는 것이다.
입체감 없는 인간 캐릭터들
그렇게 포켓몬들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만들어진 인간 캐릭터들은 심지어 밋밋하며 매력이 없다. 주인공인 팀은 개성 없고 심심한 캐릭터로 그려진다. 포켓몬 트레이너의 꿈을 포기한 후 포켓몬에게 느끼는 애증의 감정이나 어머니의 죽음 이후 소원해진 아버지와의 관계같이 주인공에게 충분히 입체감을 줄 수 있는 이야기들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너무 가볍게 다뤄지고 넘어간다. 그의 아버지인 해리 굿맨은 그냥 전설적인 명탐정으로 불리는데 그 외에 특별한 정보는 없다. 뮤츠가 실험실을 탈출할 수 있게 도왔다는 사실과 아들과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한다는 점 정도는 알 수 있지만, 그 정도만으로 이 캐릭터를 매력적으로 만들기엔 부족하다. 하워드 클리포드는 영화 최대의 반전을 가진 흑막 캐릭터이지만, 전개가 너무 억지스럽고 뻔해서 반전으로 느껴지지조차 않는다. 처음엔 사람들과 포켓몬들의 조화를 추구하는 선량한 모습으로 나오지만 나중에는 세럼 R을 통해서 포켓몬들을 폭주하게 만들고 궁극적으로는 사람들과 포켓몬들을 합성해서 새로운 인류를 만드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체를 드러내는 반전의 순간에도 왜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동기가 이해가 안 가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클리포드뿐만 아니라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한결같이 설명이 불충분하고 결과적으로 행동에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생동감 넘치는 피카츄의 모습에 영화 내내 광대가 아플 정도로 미소 지으며 봤지만 동시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포켓몬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포켓몬들이 중심이 되는 배틀 씬이나 포획 씬의 분량이 별로 없어서 멋있게 디자인해놓은 포켓몬들은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렇게 포켓몬들은 푸대접하며 만들어 놓은 스토리는 허술하고 억지스러워서 피카츄의 귀여움에 비하면 그냥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정도이다. 포켓몬에 대한 추억이 사람이라면 무조건 봐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뻔하고 유치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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