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소설 '천 개의 파랑'은 제가 요즘 SF에 꽂혀있어서 읽은 책인데, 제가 찾던 하드 SF는 아니고 완전 소프트 SF여서 살짝 김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읽기 좋은 따뜻한 책이었습니다. 보통 SF 장르라 하면 미래의 기술력을 전시하거나 예언하는 게 스토리의 큰 부분인데, '천 개의 파랑'은 과학 기술로 인해 영향받은 사람들, 그리고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입니다.
여러 분야에서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사람들을 대체한 미래가 배경으로, 우연히 인지 능력 칩이 들어간 휴머노이드 기수 '콜리'가 연골이 무너지는 말 '투데이'를 위해 스스로 낙마하는 것으로 스토리가 시작됩니다. 로봇을 수리하는 재능이 있는 공순이 '연재'는 경마장에서 우연히 하반신이 박살 난 콜리를 만나게 되는데, 일반적인 휴머노이드 로봇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집으로 데려옵니다. 그렇게 콜리는 연재의 가족인 엄마 보경, 언니 은혜, 그리고 친구 지수와 만나며 그들을 변화시킵니다. 보통은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로봇이 인간적으로 변하는 게 클리셰인데, 여기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존재가 콜리입니다. 보경과 은혜, 연재 이 세 가족은 서로에게 의도치 않게 이런저런 상처를 주면서 마음을 닫은 상태였는데, 콜리를 통해 천천히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콜리는 사람들의 말을 편견 없이 들어주고 솔직하게 반응해 주면서 누구나 맘을 터놓을 수 있는 상담사 같은 존재가 됩니다. 삶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 많은 콜리이지만 그런 콜리가 목숨을 걸 정도로 아끼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파트너 말 '투데이'입니다. 연골이 망가진 투데이에게 본인의 몸무게가 무리가 될까 스스로 낙마까지 했지만 투데이는 결국 경주마로서 쓸모가 없어져 안락사를 앞두게 됩니다. 투데이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진 은혜와 투데이를 살려달라는 콜리의 부탁을 받은 연재는 투데이가 콜리와 경기에 다시 한번 참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렇게 힘겹게 참가한 경기에서 콜리는 투데이가 더 빠르게 뛰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끼고 다시 한번 스스로 몸을 던져 낙마를 합니다ㅠㅠ... 이번에 콜리는 수리 불가할 정도로 망가지고 소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후 경마장의 동물 학대가 이슈가 되어 다행히도 투데이는 제주도에 가서 지내게 됩니다. 연재는 가족들과 가까워지고, 몸이 불편한 은혜는 연재가 발명한 휠체어로 조금 더 나아진 생활을 하게 되고, 보경도 과거의 트라우마를 서서히 이겨내고, 투데이도 제주도에서 새 삶을 사는데, 콜리만 그 그림에서 빠진 게 안타까우면서도 콜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기분도 듭니다.
이 책은 장애인들의 이동권, 동물 학대 등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다룹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할 수록 사람들이 손쉽게 외면하게 문제들을 중점적으로 다룬 게 좋았습니다. 그래서 SF 소설치곤 과학적 이야기가 많이 없다 보니 그런 걸 기대하고 책을 읽는다면 실망할 수 도 있습니다. 3인칭이던 내레이션이 마지막에만 콜리의 1인칭 시점으로 바뀌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이 작품의 제목이 등장합니다.
천 개의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짧은 삶을 살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천 개의 단어는 모두 하늘 같은 느낌이었다.
좌절이나 시련, 슬픔, 당신도 알고 있는 모든 단어들이 모두 다 천 개의 파랑이었다.
하늘이 매번 새로운 모습으로 콜리를 매료시켰듯, 이 세상의 모든 단어, 사람들이 가진 모든 감정이 콜리에겐 그만큼 신비하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살아있다고 표현하긴 힘든 휴머노이드 로봇이지만 사실 콜리는 그 누구보다 삶의 귀중함을 잘 알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 선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산다'는 것은 정작 사람들에겐 너무 당연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그 소중함을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거 같습니다. 콜리처럼 소소한 것에 감사하면서 살 수 있다면 참 행복할 텐데...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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