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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이 자유로움을 느끼는 수영장...

 

얼마 전 유키즈에 정유정 작가님이 나오신 방송을 보고 악의 3부작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제일 먼저 읽어본 책은 사이코패스 살인마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는 '종의 기원'. 구글에 검색하니 진화론을 제시하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제일 먼저 뜨네요. 정유정 작가님의 '종의 기원' 또한 사람의 내면에 존재한 악이 어떻게 구체화되고 진화하는지 제시합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청년이 자신의 '기원', 바로 사이코패스로서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거나 선한 존재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존재라는 문구가 나옵니다. 살인이라는 행위도 생존과 번식을 위한 수단으로 탄생한 것이지, 개인의 악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런 시각으로 본다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유진'은 생존을 위해 고도로 진화된 존재입니다. 그는 다른 인간들은 그냥 피식자로 취급하는 절대적인 포식자,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상위로 분류되는 프레데터입니다.  

 

주인공 유진은 어머니와 의붓형 해진과 같이 살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간질 환자인 유진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발작으로 인해 꾸준히 약을 복용해야만 하고, 그런 유진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과보호 밑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일부러 약을 먹지 않고 발작 증세를 느끼는 것은 유진이 몰래 즐기는 일탈입니다. 여느 때처럼 발작이 끝나고 새벽에 정신을 차린 유진은 거실에서 목이 베인 체 죽은 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유진의 온몸은 피투성이에, 계단과 바닥에도 유혈이 낭자합니다. 기억은 없지만 모든 증거는 유진을 범인으로 가리키고 있습니다. 유진은 현장 증거를 조사하고, 과거 스스로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 이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 추리해갑니다. 

 

처음엔 유진의 기억이 불분명한 부분이 많고, 내레이션이 계속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우왕좌왕하는 느낌이라, 유진이 꼭 조현병 환자나 정신병자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분적인 기억상실이 생긴 것은 병 때문이 아니라 그냥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살인을 저지른 후 그걸 잊어버리는 게 편하기 때문에 그냥 잊은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그의 행동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고, 회상을 통해 과거의 감정과 생각을 복기하며 사이코패스 본능에 눈을 뜹니다. 그는 밤중에 길거리에서 죄 없는 여성의 뒤를 쫓아가서 죽였고, 그걸 목격한 그의 어머니도 죽였고, 갑자기 실종된 어머니를 찾아온 이모도 죽였고, 그에게 자수를 권하던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인 해진에게 모든 누명을 씌우고 죽여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유진은 그가 꿈꾸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마지막엔 권선징악이 조금이나마 실현되길 바랬던 저의 기대감을 무참히 짓밟는 엔딩이었습니다.  보통 살인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작품인 경우, 아주 약간이나마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깁니다. 동정이나 공감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어야 작품을 계속 따라갈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중이병 또라이 캐릭터이지만, 살인 후 고뇌하다 자수하는 과정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유진은 그런 고뇌, 죄책감, 후회 따위는 전혀 하지 않으며, 자기 합리화에 아주 능숙합니다. 공감이나 이해의 영역을 아득히 넘어버린 주인공인지라, 이런 인물의 1인칭 시점을 따라간다는 건 정말 독특한 경험이었습니다. 또한 이런 책을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으면 정말 상쾌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 (당연히 반어법임) 주인공의 궤변적 심리는 공감이 불가능하고 불쾌하기까지 한 영역이기 때문에 읽을수록 심해지는 반감을 참으면서 꾸역꾸역 따라가야만 합니다. 중간중간 견디기 힘든 부분에선 제 머릿속 자체 브레이크가 걸렸는데, 그럴 때면 잠깐 책을 덮고, 한숨 한번 쉬어주고 다시 읽었습니다. 아니 작가님 도대체 이런 책을 어떻게 쓰신 거예요...;;;

 

싸패에 빙의해버린 작가님...

 

유진은 거짓말에 매우 능수능란한 인물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도 완벽하게 속여서, 자신에게 불리한 정황은 금방 잊어버리거나 왜곡해버립니다. 분명 본인이 저지른 죄인데도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행동을 쉽게 정당화합니다. 애초에 유진이 로스쿨에 가고 싶었던 이유도, 진실을 찾거나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어서 같은 이유가 아니라, 거짓으로 그럴듯한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는 점에 끌리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형 유민을 죽인 것부터 시작해서, 그 후로도 무고한 사람들을 잔뜩 죽였는데, 살인을 할 때마다 꼭 상대방에게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책임을 묻습니다. 

 

유진은 어렸을 때부터 동물 학대를 즐기고, 같은 반 여자 아이들을 소재로 소름 끼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사이코패스의 기질을 보입니다. 정신과 의사인 그의 이모는 그때부터 싸한 기운을 느끼고 유진의 엄마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찾아오라는 충고를 남깁니다. 남편과 큰 아들 유민을 사고 잃은 유진의 엄마는 그 사고가 사실 유진이 의도한 살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모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유진은 바로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게 되고, 그때부터 속에 내재된 공격성과 잔혹성을 막기 위해 약을 처방받기 시작합니다. 애초에 유진은 간질 환자가 아니었고, 그가 겪던 발작은 병의 증세가 아니라, 약을 끊었을 때 겪는 부작용이던 것이죠. 정신과 의사인 이모를 죽일 때 유진은 이모의 오진으로 인해 자신이 사이코패스로 낙인이 찍히고 인생이 망가졌다며 원망합니다. 이모는 유진이 최대한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 것 밖에 없는데 말이죠. 엄마의 일기를 보면 유진이 형인 유민을 바다에 밀어 넣고 살인을 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유진은 엄마가 본 것은 단순한 착각이었다며 일기의 내용을 정정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선 유진은 자신이 형을 죽였다는 걸 인정합니다. 새총으로 꼼수를 써서 서바이벌 게임에서 이기려 한 형에게 분개해서 바다로 걷어차 죽여버린 것을 유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유진은 사고로 형이 바다로 떨어졌다고 스스로의 기억을 조작하고, 어른들에게 능수능란하게 거짓말을 한 것이죠. 이런 유진이 그나마 마지막까지 사랑했고 믿었던 인물은 바로 의붓형이자 유일한 친구인 해진입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저질렀던 살인에 대해 숨기지 않고 다 털어놓습니다 (막판까지 숨기려다 결국엔 걸려서 자백한 거지만...). 유진은 엄마랑 이모를 다 죽여서 옥상에 숨겨놨다는 걸 해진에게 털어놓은 후 '잘 지내'라고 쿨하게 인사하고 떠나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었던 해진이 자신을 감싸주기보단 자수를 하길 요구하자 유진은 배신감을 느끼고, 자신이 지은 죄의 모든 누명을 해진에게 씌워서 물에 빠트려 죽입니다. 마지막에 자유의 몸이 된 유진은 해진을 떠올리면서 죄책감이 아니라 일종의 불쌍함을 느낍니다. '내가 사준 비행기 티켓으로 해외 가서 잘 살지, 왜 쓸데없이 자수를 하라고 해서 그 꼴을 당한 거야? 쯧쯧' 하는 뉘앙스입니다. 마지막까지 유진은 '피 냄새'를 맡으면서 앞으로도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암시를 남깁니다. 

 

통쾌한 권선징악이라던지, 사랑했던 인물을 죽임으로써 주인공이 약간이나마 변화를 겪는다던지, 그런 희망적인 전개는 없습니다. 작가님의 말을 빌리자면,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각성하는 완전한 '악인의 탄생기'입니다. 작가님은 이 소설을 이야기 자체로, 혹은 예방주사 맞는 기분으로 즐겨달라고 하십니다. 언제라도 마주할 수 있는 존재인만큼, 막연하게 두려워하기보단, 이런 스토리를 통한 대리 경험으로 조금이나마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아니 하지만 아무리 예방주사를 맞는다고 해도, 이런 '악'을 직접 맞이했을 때 효과가 있을 거 같진 않은데요ㅠㅠ...? 배운 레슨이라 하면, '인간은 고쳐 쓰는 거 아니니까 지인이 범죄자일 땐 자수 따위 시키지 말고 바로 신고한다' 정도...? 이런 상황은 죽는 날까지 결코 직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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