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페로만 웹소설을 읽던 저를 슬금슬금 네이버 시리즈로 넘어오게 만든 그 작품, '재혼 황후'에 대해 살짝 써볼까 합니다. 네이버 시리즈의 간판 웹소설인 재혼 황후는 유료분 기준으로 이미 2020년에 완결이 났고, 그 후 드라마화 소식이 떠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현대물도 아니고 로판을 드라마요...?) 지금은 웹툰으로 인기리에 연재가 되고 있죠. 얼마 전 무료분으로 본편이 완결 났기 때문에 본편의 내용만으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워낙 인기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자극적인 막장물이라는 비판도 있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는데, 왜 인기 있는지 확실하게 알겠더군요. 묘사에 충실하면서도 간결해서 읽기 좋은 필력, 수려한 일러스트, 짜임새 있는 세계관 설정, 어그로 개쩌는 캐릭터들과 그에 맞서는 멋있고 똑똑한 주인공... 한 초반 100화 정도는 중간에 화면을 끄기가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몰입도를 자랑합니다. 내가 막장에 이렇게 진심이었다니... 단순하게 스토리의 뼈대만 보자면 흔한 막장 드라마가 생각나긴 하는데, 글이 쉽게 잘 읽히고 스토리텔링이 좋습니다. 막장드가 몰입하기 힘든 이유가 억지스러운 상황과 부족한 개연성 때문인데, 재혼 황후는 스토리가 설득력 있고 매끄럽습니다. 특히 나비에가 이혼을 선언하는 부분까지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내가 이혼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내가 직접 법정에 출석하는 것 같은 긴장감이 ㄷㄷ
'재혼 황후'는 동대제국의 황후 나비에가 불륜을 저지른 남편 소비에슈를 떠나 옆 나라의 황제 하인리와 다시 결혼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나비에와 소비에슈는 어렸을 때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로서 교육을 철저하게 받아온 엘리트이며 결혼 생활도 자로 그린 듯 반듯하게 유지해왔습니다. 불타는 사랑은 없었지만 서로에게 의지하는 동료, 오래된 친구 같은 사이였죠. 하지만 소비에슈가 우연히 만난 도망 노예 출신의 여자 라스타를 정부로 들이면서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나비에는 서왕국의 왕자, 하인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터놓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가 됩니다. 교활한 여우 같은 라스타 + 자기중심적인 소비에슈가 환상의 짝을 이루면서 나비에의 자존심을 잘근잘근 밟지만, 황실의 체통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나비에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나비에가 모종의 이유로 불임이 되었다고 생각한 소비에슈는 라스타의 아이를 후계자로 삼기 위해 나비에와 상의도 없이 이혼을 감행하는데, 나비에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하인리와 재혼을 하며 최강의 사이다 모먼트를 만들어냅니다. 그 후에 나비에는 하인리와 서왕국으로 넘어가 빠르게 적응하고(역시 황후도 경력직이 최고라는 걸 증명...), 동대제국에선 라스타가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 결국 소비에슈에게 버려지고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재혼 황후의 스토리는 나비에가 재혼을 선언하는 부분이 클라이맥스였고, 라스타의 죽음이 엔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에 이어지는 스토리들은 저에게 외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턴 억지스러운 상황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정신 분열이 온 소비에슈가 나비에에게 찾아와서 개소리하는 부분에선 찐으로 한숨이 나오더군요.
불안한 부부 관계를 유지하는 나비에와 소비에슈. 그리고 그들 옆에 있는 하인리와 라스타. 이 네 명의 메인 캐릭터들이 핵심 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축이라도 빠지는 순간 이 작품이 가진 고유의 긴장감이 떨어지게 됩니다. 물론 갈등이 옅어지면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게 되지만, 동시에 막장 마라맛이 빠지게 되니 묘하게 섭섭 아쉬운 감정이 듭니다. 네 명의 캐릭터들이 한 곳에 엮이면서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고, 그 긴장감이 폭발하는 클라이맥스가 바로 1화에도 등장하는 재혼 선언 장면입니다. 그 이후로는 나비에+하인리/소비에슈+라스타가 갈라져서 스토리가 두 갈래로 진행됩니다. 나비에와 하인리는 꽁냥거리면서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라 바쁘지만, 소비에슈와 라스타에겐 몰락만이 남았습니다. 살인 청부 같은 막장 짓까지 저지르며 처절하게 버둥거리는 라스타나, 지 잘난 맛에 취해 살다가 세상 찌질하게 변해버린 소비에슈나, 그 몰락하는 과정이 참으로 끔찍하고 비참해서 읽기가 괴로울 지경입니다. 개인적으로 작가님의 필력이 가장 빛났다고 느꼈던 부분이 바로 라스타가 감옥에서 죽을 때와 소비에슈가 환영을 보다가 창 밖으로 떨어질 때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 낳은 비참한 결과. 후회. 미련. 숨 막힐 듯 몰려오는 그 무거운 감정들을 작가님이 워낙 절절하게 잘 표현하셔서 동정심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이전까진 '상황들이 너무 과하네, 이래서 막장인가 보네, '라고 생각하며 읽다가 작가님 필력 대폭발 하시는 걸 보며 '이렇게 감정을 폭발시키기 위해 상황을 몰아붙인 거구나'라고 납득했습니다.
라스타와 소비에슈가 워낙 어그로를 끌고 욕받이를 해서 그렇지, 하인리도 어떻게 보면 라스타 못지않은 사이코패스입니다; 하인리는 교육을 통해 외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졌다면, 라스타는 천박하고 노골적이라는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자신의 원하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해내는 집요함과 냉혹함이 닮았습니다. 나비에가 성격 억제제 역할을 하고 있으니 망정이지, 나비에가 없었다면 대륙에는 큰 피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하인리의 이런 자비 없는 성격은 작품 내에서도 여러 번 언급이 되며, 하인리 스스로도 나비에는 밝은 태양, 자신은 어두운 그림자 같다는 말을 합니다. 하인리가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고, 공포 정치를 하는 폭군이 되었다면, 마지막엔 라스타와 같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인리가 나비에를 만난 것처럼, 라스타도 좀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났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죠 (마침 이런 if 스토리는 외전에서 다뤄지는 것 같습니다.)
허점이 있는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주인공인 나비에는 강단 있고 빈틈없는 완벽한 인물입니다. 물론 심적으로 약해지는 경우는 있지만 도덕적인 결함을 보이는 순간은 없습니다. 보통 막장드에선 너무 착한 고구마 주인공보단 악역캐들이 인기 있는 경우가 많은데, 나비에는 착하지만 그렇다고 답답하게 순하거나 어리바리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매우 똑똑하고 지능적인 인물이죠. 단점이라면 너무 고지식한 것 정도. 똑똑하고, 아름답고, 가문도 좋고, 책임감도 강한 이런 잘난 캐릭터가 불륜 커플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니 독자들로서는 마음 놓고 편하게 감정 이입을 하며 응원할 수 있습니다. 강렬한 악역캐와 매력적인 선역 캐릭터가 공존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데, 이 작품은 그 밸런스를 잘 잡아냅니다.
본편이 완결 났으니 처음부터 정주행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들긴 하는데, 그 초반 고구마를 다시 먹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숨이 막히네요ㅠ 너무 맛있는데 너무 숨 막히는 마라맛ㅠㅠ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끊을 수 없는 맛이라 주말 통째로 비워놓고 정주행 시작해야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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