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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두부 님의 '녹슨 칼'은 네이버 시리즈에서 아직 연재 중인 작품이라 완결각이 보일 때까지 좀 기다렸다 리뷰를 쓰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60화를 약간 넘게 읽은 지금 시점에서 이건 갓띵작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라도 안 쓰면 이 벌렁벌렁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ㅠㅠㅠ 장르 소개를 보면 #여기사로판 #걸크러시 #후회남...이라고 나오는데 이런 해시태그들로는 차마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독보적인 존재감을 가진 작품입니다. 이런 작품은 더욱 널리 널리 알려져서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하는데...ㅠㅠ

 

왕이자 남동생인 체사에게 충성을 다했던 기사 히더린. 히더린은 왕의 권위를 위해 방해물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해온 악의 기사입니다. 하지만 왕에게 배신당한 히더린은 누명을 쓰고 단두대에서 숨을 거둡니다. 몇 년 후 히더린은 성녀 마가리테에 의해 부활하여 12주간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마가리테는 히더린에게 그 시간 안에 왕 체사를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 방황하던 히더린은 살아생전 그녀를 증오하던 성기사 사르그와 충격적인 재회를 하게 됩니다. 꼿꼿하고 고결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사르그는 주정뱅이로 전락해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가 그렇게 폐인이 된 이유는 바로 히더린의 죽음 때문입니다. 히더린은 그녀를 그리워하다 폐인이 되어버린 사르그를 설득하여 같이 왕 살해를 모의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캐릭터들이 가진 입체감입니다. 히더린은 일반적인 주인공답지 않게 뻔뻔하고, 오만하고, 매정합니다. 사생아+근친아로 태어나 부족한 정통성에 대해 큰 컴플렉스를 가진 히더린은 그 약점을 숨기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아왔습니다. 그렇기에 히더린은 스스로가 가진 추악함과는 대비되는 성기사 사르그의 정직함과 청렴함을 내심 동경했습니다. 자신은 이미 되돌아올 수 없는 길을 택해버린 녹슨 검과 같지만, 사르그만큼은 영원히 완전무결한 모습을 유지하길 바랍니다. 히더린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악인이지만, 그녀가 사르그에게 가진 동경만큼은 진심이며, 그녀 안에 남은 인간성, 양심, 죄책감 등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르그는 그 불같이 광포한, 절제가 없는 히더린에게 끌립니다. 히더린의 죽음 이후 폐인이 되어버린 사르그는 예전의 모습을 잃고 그녀와 같이 녹슨 검처럼 낡고 닳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더린은 사르그가 예전처럼 되돌아가길 희망하며 일부러 잔인하고 매정하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르그의 변해버린 어두운 내면만 확인하게 됩니다. 사르그는 생전의 히더린에게 다가가지 못한 걸 만회하려는 듯 더 적극적으로 행동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히더린은 더욱 멀어지려 합니다. 그가 멀리서 별처럼 빛나는 모습을 원했던 것이지, 그녀가 있는 밑바닥으로 같이 추락하는 걸 원하진 않았으니까요.  

 

주인공들 뿐만 아니라 성녀 마가리테와 왕 체사또한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엔 단순히 포악한 미치광이 왕과 불쌍한 성녀의 구도라고 보이지만, 갈수록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게 보입니다. 체사는 현재 무섭고 잔혹한 왕의 모습이나 어렸을 때부터 이런 건 아니었습니다. 유약하고 앳된 시절도 있었으나 강력한 왕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혹독하게 몰아붙이는 히더린의 영향을 받아 지금과 같은 매정한 왕으로 자라납니다. 마가리테는 일반 사람들은 볼 수 없는 헛것(?)을 보며, 갈수록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처음에 히더린을 부활시켰을 땐 그냥 절박해서 한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녀가 부활시킨 좀비가 히더린 말고도 더 있다는 복선이 나옵니다. 흑주술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시체들을 좀비로 만들어 버린다는 게 사실 정상적인 멘탈을 가진 성녀가 할 행동은 아니죠. 아직 안 풀린 스토리가 많아서 왕이나 성녀나 다 무척이나 수상해 보입니다. 

 

깊고 어두운 내면을 가진 캐릭터들의 양면성을 노련하게 그려내는 작가님의 필력에는 감탄을 연발하게 됩니다. 간결하면서도 강렬함이 느껴지는 문체와 이 와중에 놓치지 않는 적절한 위트. 작품은 전체적으로 어둡고 으시시하지만, 주인공의 능청스러운 성격에서 나오는 위트 있는 농담은 무거운 긴장감을 적절하게 누그러트리며 작품에 묘한 유쾌함을 불어넣습니다. 필력뿐만 아니라 작품의 스토링텔링 자체가 훌륭합니다. 보통 로판, 복수물이라고 하면 예상되는 스토리가 있는데, 그걸 완전 박살 내버립니다. '이제 로맨스인가?' 싶을 때 갑자기 호러가 되어버리고, '이거 완전 호러 피폐물이잖아!' 싶을 땐 로맨스가 되어버리는 예측할 수 없는 미친 전개를 보여줍니다. 스포가 되어버릴까봐 자세히는 설명을 못하지만, 한 60회쯤 어마어마한 사건이 일어나고 1부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의 전반부가 마무리됩니다. 개인적으론 왕좌의 게임의 피의 결혼식 수준의 임팩트라고 생각합니다 (조용하던 댓글창이 유독 이 편에서 폭주하는 걸 볼 수 있음ㅋㅋㅋ) 이때부터 히더린의 시점에서 사르그의 시점으로 스토리가 넘어가게 됩니다. 사르그가 어떤 이유로 그렇게 증오하던 히더린에게 빠져버린 건지 의문이었는데, 앞으로 그 이중적인 감정을 작가님이 얼마나 강렬하게 그려내실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나중에 완결이 나게 되면 다시 후기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땐 캐릭터들에 대해 좀 더 제대로 각 잡고 분석을 할 수 있겠지요ㅎㅎ 묵직한 스토리, 숨 막히는 전개, 찐한 텐션이 있는 로판을 찾는 분들에게 강력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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