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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느낌 가득한 영화, '윤희에게'

쌀쌀한 겨울밤에 볼만한 거 없나 찾다가 발견한 멜로 영화 '윤희에게.' 포스터부터 잔잔한 독립영화 느낌이라 좀 지루할 수도 있겠거니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먹먹함과 여운이 진하게 남는 존잼 띵작이더군요. 주인공 '윤희'는 첫사랑 '쥰'에게서 온 편지를 받고, 딸 '새봄'과 같이 쥰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사실 처음엔 윤희와 쥰이 학창 시절에 어떠한 관계였는지 정확히 표현되지 않습니다. 서로의 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고,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윤희가 부모님에게 쥰과 사귄다는 말을 했다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고, 결국 쥰에게 이별통보를 했다는 것이 밝혀지죠. 윤희와 쥰의 절절한 감정은 영화 내내 느껴지는데 정작 둘이 같이 있는 씬이나, 둘의 케미를 확 보여주는 에피소드는 별로 없다는 게 개인적으론 아쉽게 느껴집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톤 자체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눈 쌓인 마을처럼 고요하고 차분합니다. 섬세한 감정 표현의 정통 백합물을 찾는 덕후라면 무조건 좋아할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착즙에 익숙한 백합러이지만, 그래도 공식이 떠먹여 주는 게 좋은데요...ㅠㅠ)

 

중년 퀴어 멜로물이라는 소재를 얼핏 보면 자극적인걸 기대할 수 있지만, 윤희와 쥰은 그런 자극과는 거리가 먼, 첫사랑의 아련함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관계입니다. 고독을 씹으며 묵묵히 차가운 세월을 견뎌온 두 사람이 다시 봄을 맞이하고, 새 출발을 하는 과정이 담담하게 그려지면서도 찡한 울림을 남깁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인물은 바로 윤희의 딸, 새봄입니다. '새봄'이라는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줄곧 겨울 속에서 살아온 윤희와 쥰이 새 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윤희-새봄의 모녀관계는 윤희-쥰의 관계만큼이나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윤희. 그런 윤희를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녀가 변하길 바라는 딸, 새봄. 쥰에게서 온 편지를 먼저 읽어본 새봄은 엄마의 과거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됩니다. 그 후에 새봄이의 행동은 그녀가 이 작품에 나오는 그 누구보다 성숙하고 능동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새봄이는 편지를 읽고 충격을 받거나 혼란스러워 하기보단, 엄마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입니다. 자기가 대학에 가고 나면 엄마는 스스로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며 충고를 하기도 하고, 쥰과 만나게 해 주기 위해 쥰이 사는 곳으로 넌지시 여행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두 모녀는 서로에 대해 더 깊게 이해하게 되고, 전보다 감정표현도 더욱 풍부해집니다. 윤희가 담밍아웃(;;)하고 새봄이에게서 라이터 뺏는 씬은 정말 좋았습니다ㅋㅋ 아름다운 것만 찍기 때문에 인물 사진은 찍지 않는다던 새봄이가 담배 피우는 윤희의 사진을 찍는 것도 넘나 완벽...ㅠㅠ 둘이서 온천에서 옛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장면 (여기서 윤희가 언급하는 인물이 아마 쥰일듯), 이불 뒤집어쓰고 뒹굴거리는 장면, 눈사람 만들다가 눈싸움하는 장면... 사실 중년 멜로물이라는 건 곁다리 소재(?) 느낌이고 두 모녀가 같이 추억을 만들며 서로에게 다가가는 내용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쥰과 윤희...두 분다 넘나 존예 보스라서 눈 호강ㅠ

아, 물론 쥰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쥰이 윤희에게 쓴 편지를 읽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는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참고 참다가 견딜 수 없어서 토해내는 듯한 그 감정이 차분한 톤 안에서도 느껴져서 내레이션을 들으면서 괜히 울컥했습니다. 쥰은 어렸을 땐 한국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의 이혼 후 아버지와 같이 일본으로 가게 되는데, 사실 윤희와 헤어진 후 도망치고자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쥰은 미혼인 체로 고모와 쭉 살다가, 연락만 간간히 하고 지내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윤희를 다시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옛날부터 항상 윤희를 마음에 두고 있긴 했지만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좀 더 과거를 돌아보게 되고 애틋함이 커진 듯합니다. 윤희는 가족의 등쌀에 떠밀려서 일찍 결혼을 했는데, 쥰은 쭉 혼자서 지내고 있고, 주변에서 소개해주는 사람조차 밀어내는 모습을 보입니다. 쥰이 운영하는 동물병원에 찾아오는 어느 여성 손님은 쥰에게 꽤나 적극적으로 다가오는데, 쥰은 '지금까지 숨겨온 비밀은 앞으로도 쭉 숨겨라'라고 말하면서 선을 긋습니다. 과거, 윤희와의 관계가 커밍아웃 이후에 망가진 것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편지에서 쥰은 그녀의 동네는 눈이 많고, 사람은 없는, 조용하고 한적한 동네인데, 그런 동네가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윤희에게도 잘 어울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윤희처럼 쥰 또한 스스로를 고립시킨 체 묵묵히 겨울을 견뎌내 왔습니다. 그 와중에 고모는 몰래 쥰이 쓴 편지를 윤희에게 보내고, 새봄이가 그 편지를 읽게 되며 그렇게 계절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윤희는 편지에 적힌 쥰의 집주소로 찾아가 보지만 쥰의 모습을 보고 당연히(;;) 도망쳐버립니다. 용기 없는 두 어른들을 만나게 하는 건 역시 빅픽쳐 마스터 새봄이...갓새봄이 없으면 전개가 안되죠ㅠㅠ 그렇게 새봄이의 도움으로 윤희와 쥰은 눈물 어린 재회를 하고 담백하게 인사말을 나눕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온 윤희는 죽지 못해 꾸역꾸역 사는 것 같았던 전의 모습과는 달리 이제는 스스로를 좀 더 꾸미고, 새로운 일자리도 알아보고, 나중엔 가게도 차리고 싶다며 새로운 미래를 꿈꿉니다. 영화는 이제 달라진 윤희가 쥰에게 쓰는 답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수십 년간 떨어져 있었지만 결국 같은 마음,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고 응답하는 윤희. 윤희가 용기 내어서 이 편지를 쥰에게 보냈는지, 이 후로도 윤희와 쥰은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건지, 쥰에게는 어떠한 봄이 찾아온 것인지 궁금증이 많이 남습니다. 나중에 윤희가 가게 개업하면 쥰이 찾아와서 수다 떨고 식사하는 그런 따뜻한 봄날을 상상해봅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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